'나를 자극하는 것들'에 해당되는 글 50

  1. 2009/03/18 사람과 고양이의 사랑 듀이 (4)
  2. 2008/12/09 생각하고 감정을 가진 생명이 세상으로 나오는 순간
  3. 2008/12/04 고양이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4. 2008/10/24 사랑의 롤러코스터 - 요조
  5. 2008/10/22 고은 인터뷰 - 폐허 위에 화엄의 집 지은 시인 고은
  6. 2008/07/24 거울앞에서2
  7. 2008/02/22 러시아의 미술을 볼 수 있는 칸딘스키와 러시아 거장전 (2)

사람과 고양이의 사랑 듀이

듀이 : 세계를 감동시킨 도서관 고양이 - 10점
비키 마이런.브렛 위터 지음, 배유정 옮김/갤리온

 

얼마전에 여자친구분게 '듀이' 라는 책을 선물 받았다. 아마 발렌타인데이 선물로 받은 것으로 기억을 한다. 이 책은 처음에는 기사로 접했던 것 같다. 고양이가 주인공인 책이 전세계적으로 유명해지고 베스트샐러가 되었다는 내용의 기사. 그 당시에 그 기사를 보면서 나쓰메소세키의 일본 소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가 생각이 났다. 그 소설처럼 고양이가 생각하는 가상의 소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아마 네이버 웹툰에서 보고 있던 고양이 시점으로 그린 빠삐냥이라는 상상 만화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게 고양이 입장에서 고양이가 어떻게 생각할지를 상상해가면서 쓴 소설인 줄 알았는데 책을 조금씩 넘기다가보니 미국 아이오와주 스펜서라는 작은 도시의 도서관에서 발견 고양이 이야기였다. 매우 추운날 우연히 도서관 반납함에서 발견된 새끼 고양이. 그 고양이가 도서관에서 자라면서 '듀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고 사람들이 '듀이'를 좋아하면서 뭉치게되는 이야기.

 

이 책의 작가이자 '듀이'의 어머니격인 비키 마이런은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들이 그렇듯 자식처럼 대하기도 하고 때로는 강력한 의지대상으로도 여기면서 사랑한다. 이는 도서관장 비키뿐만 아니라 스펜서 도시사람들 대부분이 그렇게 여기게 되는데 듀이라는 한마리의 작은 새끼고양이가 어떻게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사랑을 주면서 활력을 불어넣는지를 잘 보여준다. 듀이라는 고양이는 다른 고양이들과 매우 비슷하면서 매우 달랐다. 물을 싫어하거나 먹고 싶은 먹이만 먹는다거나 문밖으로 도망가서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싶어하는 것이나 모두 고양이의 일반적인 특징이다. 하지만, 큰 차이점이 있었는데 그건 다른 사람을 사랑할 줄 안다는 것이었고, 자신을 살려주고 보살펴준 스펜서 도서관을 무척이나 좋아한다는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후자쪽이 강했기 때문에, 도서관을 자신의 집처럼 그리고 자신의 생명을 구해준 큰 은혜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도서관에 오는 사람들과 도서관의 일들을 당연히 사랑할 수 밖에 없지 않았나 생각이 된다.

 

듀이가 도서관을 사랑하는 만큼 도서관에 오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만큼 사람들은 듀이때문에 변화한다. 한데 뭉치게 되고 도서관을 좀 더 사랑하게 되고 공통주제가 생기고 활력이 생기는 것이다. 이 한마리의 고양이가 이 모든 것을 이루어냈다고는 할 수 없지만 분명 스펜서 주민들은 듀이를 사랑하고 듀이의 사랑때문에 좀 더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게 된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도 있다. 단순히 한마리의 고양이가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행동을 했을뿐인데 그걸 본 사람들이 자기 입장에 맞추어서 생각한 것뿐이다. 그럴지도 모른다. 고양이가 얼마나 큰 뜻을 품고 사람들을 사랑해서 변화를 시켰겠는가 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 책을 읽고 나서 내가 예전에 잠깐 만났던 고양이들을 생각해보면, 비키나 스펜서 주민들이 듀이를 대하는 것보다 훨씬 교감이 부족하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많이 든다. 사람이 이성적으로 생각해서 일을 하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고양이들의 행동이나 얼굴표정등으로 교감이 가능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인간대 동물이 아니라 동등한 입장에서 정말 사랑해주고 귀여워해주고 생각해줬더라면 머리로서 생각되는 말로서 표현되는, 이성적으로 사고가 되는 것이 아니라 비키와 듀이처럼 다른 감각들로 통하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가 많이 된다.

 

동물은 특히나 반려동물이라고 칭해지는 개, 고양이등은 사람과 무척이나 가깝게 지낸다. 그리고 사람들이 인간-동물의 관계가 아니라 친구나 동생 자식 관계처럼 생각하고 감정으로서 대해주면 머리로서 생각되는 그 이상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이 책에서 자연스럽게 그 과정들이 보여지고 그것들이 실제로 실현 가능함을 증명해준다.

 

마지막으로,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 책을 읽으면서 많이 공감할 것 같다. 고양이의 일반적인 습성들이 재밌게 현실에서 나타나며 얼마나 사람과 고양이가 가까워질 수 있는지. 그리고 서로 사랑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니까. 자신과 함께하고 있는 고양이와 좀 더 가까워질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줄 것이다.

이 글은 스프링노트에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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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고 감정을 가진 생명이 세상으로 나오는 순간


우연히 신문을 보다가 윗 사진을 보고 흠짓하고 놀랐다. 생명이 탄생하는 순간. 하나의 생각을 가지고 감정을 가진 생명체가 이 세상으로 나오는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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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Ninja cat comes closer while not moving!

귀여운 녀석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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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롤러코스터 - 요조



사랑의 롤러코스터 - 요조

사랑의 롤러코스터
날 올렸다 내렸다
사랑의 롤러코스터
또 타고 싶어서
사랑을 찾아서 떠나요

장미 밭을 지나야 한다면 지나겠어요
꽃의 향이 날 안아 뽀뽀하네요
더운 날이 온데도 상관없어요
난 사랑이 좋아요

조금 힘들 거 나 알지만
사랑을 찾아서 떠나요


사랑의 롤러코스터
날 올렸다 내렸다
사랑의 롤러코스터
또 타고 싶어서
사랑을 찾아서 떠나요

장미 밭을 지나야 한다면 지나겠어요
꽃의 향이 날 안아 뽀뽀하네요
더운 날이 온데도 상관없어요
난 사랑이 좋아요


조금 힘들 거 나 알지만
사랑을 찾아서 떠나요

사랑의 롤러코스터
날 올렸다 내렸다
사랑의 롤러코스터
또 타고 싶어서
사랑을 찾아서 떠나요
사랑을 찾아서 떠나요
사랑을 찾아서 떠나요
 


정말 사랑은 롤러코스터와 같은 것 같아.
장미 밭을 지나고 꽃의 향아 날 안아 뽀뽀하고
덥고 추워도 사랑.

사랑은 역시 롤러코스터와 같은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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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 인터뷰 - 폐허 위에 화엄의 집 지은 시인 고은

폐허 위에 화엄의 집 지은 시인 고은




 경기도 안성군 공도면 마정리 대림동산에 위치한 고은 선생을 댁을 찾은 지난 2월 7일엔 새벽부터 큰 눈이 내렸다. 출발하기 직전 자택에 전화를 걸었더니 부인 이상화(중앙대 영문과 교수) 선생께서 안성에서 산 23년 동안 가장 많은 눈이 내린 날이라며 여로를 걱정해 주었다. 하지만 강행했다. 우리가 만나야 할 사람은 고은이기 때문이었고, 고은은 73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에서 가장 바쁜 문인이기 때문이었다. 시인 고은은 지난 해 절반 이상을 해외에 불려 다녔고, 올해만도 1월말에 벌써 이탈리아어판 시집 《순간의 꽃》 발간을 계기로 밀라노에서 발간 기념행사를 마치고 돌아왔다. 그러고 돌아와선 곧바로 올해 완간을 목표로 하는《만인보》의 마지막 작업에 매진하고 있다.

 문학을 매개로 한 대외적 행사에서는 물론 집필 분량에서도 인간의 한계를 보여주는 사람, 그가 고은이다. 명성이 큰 사람일수록 극과 극의 평판을 오가고 시인 고은 또한 그러한 존재이지만, 지금 세계에서 ‘시인’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을 대표하는 사람이 고은이라는 사실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극단적 허무주의자에서 유미주의자로, 다시 민족의 현실을 온몸으로 끌어안은 리얼리스트로서의 골곡 많은 그의 생 자체가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와도 같은 대서사시다. 그의 서사시적 인생은 이미 전설이 된 만큼 잘 알려져 있지만, 안다고 해서 압도당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알면 알수록 단절과 변모를 거듭한 인생을 어떻게 한 개별자의 삶으로 통합해야 하는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여전히 내렸다 그쳤다를 반복하는 눈발의 예측 불가능한 날씨처럼, 선생의 집으로 행하는 기자의 마음 또한 그랬다.


죽음에의 유혹, 그리고 시

 고은은 1933년 8월 1일 전북 군산에서 아버지 고근식, 어머니 최점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다정다감한 아버지와 무뚝뚝한 어머니라는 상반된 성품의 부모 밑에서 자랐지만, 공부는 물론 일본어 작문과 미술에서도 두각을 나타내던 고은은 가족과 학교에서 두루 큰 사랑을 받으며 컸다. 식민지라는 시대적 우울과 타고난 어둡고도 그칠 줄 모르는 에너지가 결합되어 그는 반 고흐나 나병 시인 한하운과 같은 비극적 삶과 예술에 경도되었지만, 그의 삶을 죽음과 파격의 역동적 미학으로 이끌었던 것은 고은의 눈앞에 무참하리만치 생생하게 폐허를 보여준 한국전쟁이라는 ‘현실’이었다. 맥아더 장군이 인천상륙작전(1950년 9월)의 성공을 위해 관심 분산의 차원에서 군산 항구를 폭격했고, 그는 가난했지만 활기에 넘쳤던 자신의 고향이 한순간에 폐허로 바뀌는 것을 목격해야 했다. 또한 좌우의 대립이 서로를 죽음으로 내몰던 야만의 시대는 어린 소년을 인간과 그 인간이 만든 모든 가치를 부정하게끔 만들었다. 그런 정신적인 충격 속에서 다음해인 1951년 그는 두 차례의 자살 시도를 했고, 군산북중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다가 동국사에서 승려 혜초를 만남으로써 속세의 삶을 접고 승려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그의 나이 18세 때였다.

 동양철학은 물론 서양철학까지 두루 섭렵하게 만들었다가 갑작스레 환속해 충격을 안겨준 혜초를 거쳐, 다시 혜초의 스승인 효봉을 스승으로 섬기며 수행과 행각승으로 전국을 떠돈 지 5년만인 24세에, 그는 효봉 스님을 따라 상경해 《불교신문》을 창간하고 초대 주필 자리에 앉는다. 이 《불교신문》을 편집하며 자투리 공간에 자신의 시를 끼워 넣던 고은은 다음해인 1958년 서정주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하고, 오랜 부패의 역사가 죽음으로 삶을 회생시킨 4·19 혁명의 짧은 불길 속이던 1960년에 첫 시집 《피안감성》을 펴낸다. 그리고 그 2년 후인 1962년, 지속적으로 증폭되어 왔던 불교 종단에 대한 실망으로 마침내 환속을 선언한다.

 다음해인 1963년, 그의 나이 서른에 그는 제주행 배를 탄다. 목적은 선상 자살. 세 번째 시도마저 미수로 그친 그는 천분으로 태어난 시인으로서의 의무에 겸허해지기로 한다. “죽지 못해 살아난 인생, 내 모국어를 다시 배워야겠다는 결심”으로 제주도 촌구석 제지소에서 구한 허름한 사전을 달달 외기 시작한다. 창녀촌에서 하숙하며 취한 밤이면 무덤으로 찾아들고 그러면서도 미친 듯 사전을 외고 시를 쓰던 나날. 잠든 고은의 모습을 그 누가 건드릴 수 있었겠는가. 인간이 가진 달랑 두 가지, 육체와 정신으로 그는 죽음을 향하고 있었지만,  그 지향의 목적은 ‘소통’이었다. 그는 시로써 세상에 말 걸고 싶었고, 내면으로 침잠할 때면 자신 속에 양립하고 있는 삶과 죽음에게 말 걸고 싶었다. 무덤 속에서 빠져나와 자신의 거처를 침범한 취한 고은의 얼굴을 바라보는 귀신조차 그런 그를 어쩌지 못했으리라. 그 소통의 욕망이 죽음의 형식으로 나아가더라도 신은 가끔 멈칫한다. 그 욕망과 형식의 조화가 최대의 아름다움을 빚어낸다면. 신도 멈칫거리게 한 고은의 아름다운 시편은 그와 전혀 다른 배경을 가지고 있는 평론가 김현을 제 발로 제주도로 찾아오게 만들었다. 그가 흠모하여  배운 보들레르를 그 자체로 살고 있는 승려 출신의 시인이 자신의 모국 제주도에 현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현은 술 취한 고은이 뱉어놓은 주사조차 메모해 다음날 그에게 들려줬다. ‘당신이 어제 이렇게 위대한 말을 했다’라면서.

그런 제주도 생활 4년을 끝내고 고은은 서울로 올라간다.


불타(佛陀)의 절망, 인간의 절망

“여전히 늘 삶의 의미보다 죽음을 찾고 있을 때였지. 무교동 술집에서 술만 퍼먹고. 그때 소주는 35도 독주였고 밥 안 먹고 낙지 같은 매운 안주만 먹었어. 통행금지 시간이 되면 주인이 내쫓는데도 술집 의자 위에서 잤어. 그러던 어느 날 자다가 굴러 떨어져 시멘트 바닥에서 눈을 뜨니, 옆에 신문지 쪼가리가 굴러다니더라고. 노동자 전태일의 분신 사건이 실려 있었고, 그에 대한 사설도 실려 있었죠. 나도 끊임없이 죽음을 추구한 사람이었지만 이 사람은 왜 죽음을 택했나, 머릿속에서 그의 죽음이 악몽처럼 떨어지지가 않더라고.”

 1970년, 그의 나이 37세 때였다. 그때까지 총리 이름도 모르고 시장에서 콩나물 값이 얼마인지도 몰랐던 그는 전태일의 죽음으로 인해 마치 도미노 게임의 카드가 와르르 한쪽으로 쓰러지듯이 급격히 사회현실 쪽으로 눈을 돌렸다. 그 이후로 10년 동안, 그는 지나간 세월에 대한 보상이라도 하듯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개인적·조직적 활동을 한꺼번에 쏟아냈다. 삼선개헌 반대운동의 문인 대표로 참여했고, 간첩 사건 등 온갖 공안 조작사건과 노동운동에 대한 탄압의 저항에 선두를 지켰으며, 1974년엔 자유실천문인협회를 창립하고 가택구금과 체포의 나날을 보냈다. 그런 박정희 유신시절은 김재규의 총탄으로 스러져가는 듯 보였다.

 “1980년 짧았던 ‘서울의 봄’, 박정희의 유신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시대가 오는 것처럼 느껴지던 혼란기가 있었죠. 그때 나는 민주화 운동의 중심부에 있었기 때문에 전국의 민주화운동과 학생운동 상황과 늘 관련되어 있었는데, 그 직후 들어선 신군부 정권이 ‘내란 음모’라는 터무니없는 죄목으로 나를 남한산성 밑의 육군교도소 특별 감방에 수감했어요. 육군교도소의 특별 감방은 창도 없었고, 미로 구조라서 누가 어디에 있는지 몰랐어요. 40촉짜리 전등불이 꺼지면, 사진을 현상할 수 있을 만한 암실이 되었죠. 그 당시 김대중, 문익환 등 나를 포함해 그 특별 감방에 갇힌 다섯 사람은 살아나갈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들어가는 통로에서부터 고정된 기관총을 볼 수 있었으니까. 이따금 전기가 꺼졌어요. 소장이 나와서 요즘 전기 사정이 안 좋아서 자주 꺼진다고 했지만, 어둠 속에 처박아두는 일종의 고문을 한 것이지. 그런 식으로 그들은 우리의 심신을 완전히 죽여 놨어요.”

 그 속에서 그는 시를 구상하는 일로 하루하루를 견뎌냈다. 절망적인 수인의 몸으로 오로지 '내가 앞으로 살아 나갈 수만 있다면 이런 것을 써야겠다’며 시를 구상하는 것이 그의 존재 이유였다. 나라를 잃었던 시절 나라를 찾기 위한 무장투쟁·독립운동을 했던 사람들의 서사시(《백두산》), 자신이 직접 만난 사람뿐 아니라 만나지 않은 사람과 역사 속의 사람, 역사 속에 있을 법한 이름 없는 사람 등을 망라해서 거대한 우리 겨레의 지도를 서사화해야겠다(《만인보》)는 결심을 바로 그때 한 것이다. 1년 동안의 군사재판을 거쳐 고은은 일반 형무소인 대구교도소로 옮겨졌고, 1982년 8·15 사면으로 3년의 수감 생활을 끝내고 석방된다.

 다음해인 1983년 5월, 그는 10년 전부터 알고 있었고 막 영국 유학에서 돌아왔던 이상화와 운명 같은 결혼식을 올린다. 수유동에 있던 신학자 안병무의 집에서 지인 100명만 초청해 식을 올렸다. 그리고 결혼과 함께 지금 살고 있는 안성으로 삶터를 옮겼다.

 “그때까지 나는 안성에 어떤 연고도 없었어요. 그런데 나랑 민주화투쟁을 한 고려대 법대 이문영 교수가 나와 함께 감옥에서 나온 뒤로 드라이브 겸 안성을 찾았나봐. 그러고선 나에게 전화를 하더라고. ‘나는 오늘 하나님께서 고은 선생 살라고 내려주신 집을 보고 왓습니다’라고. 그 수사가 좋아서 조금 있으면 내 아내 될 사람과 이문영 교수를 따라서 안성엘 왔고 그 자리에서 살기로 결정해 버렸어요.”

 옥중에서는 미친 듯 시를 쓰고 싶었건만, 막상 나와 보니 그 욕망들이 마치 홍수에 가재도구들이 죄다 떠내려가듯 일시에 사라져버려 다시 폐허가 된 느낌이었다. 그런 일종의 정신적 공황 상태를 거쳐 안성에 정착한 지 2년 만에 비로소 그는 구상해놓았던 장편 대서사시 《백두산》과 《만인보》를 신들린 듯 세상 밖으로 꺼내놓을 수 있었다.

 고은의 행보에서 빠뜨릴 수 없는 것이 남북작가회의의 추진이었고 마침내 해방 60년을 맞은 지난 해 6월 15일, 최초의 남북작가회의가 백두산과 묘향산에서 5박6일 동안 진행됐다.

 “1985년 자유실천문인협의회 특별 강연에서 처음으로 남북작가회담을 제안했었어요. 당시엔 그런 제안만으로 감옥에 가서 장기수가 될 수 있는 시절이라 안기부한테 협박 많이 당했어요. 그래도 나는 그 신념을 포기하지 않았고, 일본의 진보적 지식인들에게 북쪽과 연락해서 작가회담을 성사시켜 달라고 극비리에 끊임없이 부탁을 했었죠. 드디어 1989년 북쪽에서 회담에 응하겠다는 통지가 왔어요. 그래서 나와 신경림·백낙청 등 남쪽 대표 5인이 판문점으로 향했는데, 미군의 승인 없이 판문점에 들어갈 수가 있나. 다들 집으로 돌아가야 했고 나만 혼자 상징적으로 잡혀서 국가보안법으로 4번째 옥살이를 했어요. 그러나 당시 국제 팬클럽으로 대표되는 세계의 문인들이 열렬하게 구명 운동을 해주어서 석방될 수 있었죠.”

그런 고초에도 불구하고 민족문학작가회의 활동을 통해 꾸준히 남과 북의 작가들이 한 자리에서 만나는 모임을 시도한 지 15년 만에, 드디어 꿈을 이룬 것이다.  

“그 감격은 말로 다 할 수 없지. 백두산에 오르기 전날 밤 불안해서 잠이 안 왔어요. 내가 1997년 처음으로 방북해 백두산에 오른 전날에도 흥분감에 잠을 못 이뤘던 것처럼. 힘들게 이루어진 일인 만큼 자연의 축복도 받고 싶었어. 그러나 백두산의 기후는 불안정해서 어떻게 될지 몰랐지. 다음날 새벽에 북쪽 대표자랑 백두산을 올랐더니 해가 벌겋게 떠오르는 거야. 그리고 한쪽에선 달도 아직 지지 않고 있었죠. 일월이 같이 있는 광경, 그 얼마나 축복이야. 그런 장관 속에서 남과 북의 작가들이 서로 껴안으며 두 시간 동안의 축제를 보내고 내려왔어요.” 

 그는 또 지난해 1월 결성된 겨레말 큰 사전 남북공동편찬위원회의 상임위원장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앞으로 7~8년 뒤 남북이 최초로 하나의 사전을 가지게 되는 사업의 책임을 맡게 된 것이다. “죽기 전에 겨레의 말이 하나의 사전 속에 함께 묶여지는 것을 이룬다면, 은혜를 많이 받은 이 땅에서 조금은 빚을 갚고 여한 없이 떠날 수 있을 것 같아요.”


마음의 폐허 위에 화엄의 집을 짓다

그의 문학적 여정에 있어 또 하나의 큰 변화를 가져다준 것은 1999년 미국 하버드대 옌칭스쿨과 버클리대에서 객원교수로 있던 시절이었다. 그때 그는 한국의 민족문학이 세계문학으로서의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우리 아내와 내가 결혼할 때 백낙청 교수가 덕담처럼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죠. 이 결혼은 두 사람만의 결혼이 아니라 민족문학과 세계문학이 만나는 것이라고. 그런데 공교롭게도 정말 그렇게 되어버렸어요. 안식년을 맞은 아내는 하버드대 영문학부 교환교수로, 나는 특별연구교수로 초청돼 미국에 간 것이었고, 거기서 내 문학의 공간이 넓혀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어요.”

 그는 아직도 자기 문학의 고향은 폐허라고 여긴다. 한국전쟁으로 고향이 폐허가 되고 인간의 마음속에도 폐허가 생겨났다. 어떤 의미에서 그는 그 폐허에 더욱 자신의 마음을 부려놨었고, 그것이 젊은 시절 그의 자살 시도를 부추긴 것이었다. 그는 지금도 폐허를 좋아하고 거기 익숙하다. 가령 고대 그리스 신전이나 개성 만월대 같은 폐허를 보면 말할 수 없이 황홀해져버리고, 근원으로서의 향수가 살아나는 듯하다. 그런 허무주의에서 나중에는 오스카 와일드나 보들레르 류의 유미주의로 넘어갔고, 전태일과의 만남 이후에 다시 민족문학으로 세계로 들어섰다.

 “그렇게 20년 가까이 살다 보니 민족문학에 다른 눈이 붙어야 하고 다른 육체의 살이 붙어야 한다는 걸 알게 됐어요. 사회라고 하는 것은 무한히 큰 공간이긴 하지만 또한 인간에게 한계를 주기도 하는 공간이죠. 나는 그런 갇힌 틀 속에서 기계처럼 살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사회와 다른 꿈이 만나는 화엄의 세계, 커다란 포용의 문학을 지향하게 됐어요. 그러던 중 미국에 가서 보다 드넓은 시각을 가질 수 있었고, 우리의 남과 북을 노래하되 그 대상을 세계로 넓혀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게 됐어요. 나는 보편성이라는 것이 서구문학에만 있고 아시아문학 혹은 한국문학에는 없다는 헛소리들은 인정하지 않아요. 한국에서도 얼마든지 세계의 보편타당성을 갖는 문학 언어를 꽃피워낼 수 있어요.”

특수와 보편도 서로 몸을 바꾼다. 어떤 특수성은 오랫동안 발전해 보편이 되고, 서구 보편성이라는 것도 서구 중심의 자기 특수성이다. 바로 그런 점을 그는 지난해 프랑크푸르트 도서전 개막 연설에서 지적했고, 서구 문학인들로부터 많은 지지를 받았다.

 페허 위에서 지은 고은 문학의 집은 정·반·합의 변증법적 과정을 거쳐 이제 통합의 목소리로 세계를 향하고 있는 것이다.


파격을 넘어 포용의 세계로

 도저한 허무주의자에서 민족주의자로서의 변모, 숱한 기행과 뚜렷한 정치적 실천까지, 그의 삶은 도무지 한 사람의 생 같지 않다. 본인 스스로는 그 모두 자신의 삶이였다며 내부에서 통합해낼 수 있을까.

 “그렇지 통합됐지. 통합되어서 지금 무엇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면서 본인이 생각해봐도 자기가 복수(複數) 같다며 맑은 웃음을 짓는다.

어떤 사람의 눈에는 단절의 과정으로 점철된 삶으로 해석될 수 있을 텐데. 

 “단절이 있었죠. 어떤 의미에선 단절이 아주 심한 편이었죠. 그러나 그게 그냥 단절이 아니라 반드시 다른 것으로 연결되는 끈이었다는 것을 이제는 알 수 있어요. 당시에는 단절이었으나 무한히 다른 것으로 연결되어 있는, 그리고 연결되어야 하는 존재, 그것이 인간 존재인 것 같아요. 동작, 행위로서의 존재인 것이지.”

 요즘 그가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을 때 머릿속을 지배하는 생각은 무엇일까.

 “그건 모르겠네. 생각이라는 게 손님이야. 내 소유물로서 내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지가 찾아와서 들렀다가 가는 거지. 나 자신은 궁극적으로는 없어. 자아는 무아야.”

 미국에서 펴낸 그의 《만인보》는 최근 재판에 들어갔고, 지난 겨울 출판한 영문판 《어린 나그네》(소설 《화엄경》) 역시 지금까지 2천200부가 팔렸다. 선시집 《뭐냐》의 영문판도 3쇄에 들어갔고, 같은 시집이 독일에서도 매진되었다. 스웨덴어판 《만인보》 초판이 매진되었으며, 지난 해 8월 노르웨이에서 열린 ‘2005 비에른손 페스티벌’에서는 비에른손 훈장을 받기도 했다. 이런 국제적 명성으로 그는 2002년부터 매년 10월이 가까워오면 노벨문학상의 유력한 후보로 뉴스를 장식하곤 한다.

 “나는 모르는 일이예요. 나 역시 외신을 통해 알려지는 것 외엔 아무것도 몰라요. 그리고 그게 나를 참 구속해요. 외국엘 가도 노벨문학상 후보자라는 것이 마치 무슨 내 명함처럼 되어버려서 참 거북해요. 단순하게 ‘시인 아무개’, 그러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이제야 알겠어요.”

 올 한 해도 고은을 필요로 하는 국내외 행사가 줄을 잇고 있다. 그러나 그는 되도록 사양하거나 미루면서 올해는 글쓰기에 매진하려고 한다. 써야 할 것이 아직도 많지만 미리 말하고 싶지는 않단다. 산문시도 있고 장시도 있고 여러 가지가 있다. ‘나가겠다, 나가겠다’ 하고 있는 몸속의 씨앗이 여럿 있다. 물살을 거스르는 고기처럼, 그 씨앗들은 힘이 세다. 

 “시를 쓰다가 죽고, 무덤 속에서도 시를 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리고 더 이상 쓸 것이 없을 땐 죽어야겠지?”

 시인 고은의 마지막 말이다.


출처 : 월간 문학사상 200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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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앞에서2


거울앞에서2   - 김형영

웃어보려 해도
웃어보려 해도
웃음이 나오지 않아
거울 앞에 와서
물끄러미 바라보는
내 얼굴이여
평생이 한꺼번에
부끄럽구나


**중앙일보(2006. 6. 9<금> 31면 '시가 있는 아침')게재


**이문재 시인:

거울을 바라보며, 그러니까 자기 얼굴을 보며 웃음을 짓는다면, 그 사람은 행복한 것이다.거울을 마주 보며, 삿대질을 한 적이 있다. 사진을 찍을 때도 웃는 적이 거의 없다. 자기애(自己愛)를 배우지 못한 세대가 있다. 소풍가는 날이면 비가 오고, 내가 응원하면 지고, 내가 찍으면 떨어지고, 내가 사랑하면 도망가고...... 자기애가 없는 자존심은 악이다.사회악이다.살아온 날 가운데 최고였던 그날을 떠올리며 웃고, 살아갈 날 가운데 최고일 그날을 떠올리며 웃자. 거울 앞에서 매일 두 번씩 웃자. 나를 위하여 하루에 두 번씩 웃자.


꽃이 져도 너를 잊은 적 없다 - 10점
이문재 엮음/이레

이문재 시인이 2006년 봄부터 여름까지 <중앙일보> '시가 있는 아침'에 연재했던 시 묶음집이다. 고은 시인의 '그 꽃'에서 시작해 황동규 시인의 '조그만 사랑 노래'에 이르기까지 56 명의 시인의 시를 한 편씩 싣고 있는데 제목은 정호승 시인의 '꽃 지는 저녁'에서 따 왔다. 각 편에는 해설이라고 하기는 좀 그렇고... 그 시를 고른 혹은 그 시에 의해 선택된 이문재 시인의 간략한 감상평이 같이 실려 있는데 신경림 시인의 <시인을 찾아서>처럼 시인의 시 세계 전체를 조망하며 그의 시 세계로 안내하는 이정표 구실을 하는 정도는 아니다.


조간지에 아침마다 실리던 시이니 만큼 낮은 목소리로 조근조근하게 세상과 나, 나눔과 공동체, 삶의 의미 등등을 펼쳐보이며 감정 조절을 하고 있다. 그런 만큼 시인 개인과 세상의 치열한 대립이나 존재의 기반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치열한 사랑 등등은 기대하기 어렵다.


마시기는 쉽지만 부케가 심플하고 피니쉬가 짧은 와인처럼 가벼움이 아쉬움으로 남는 시집

참고 : http://blog.naver.com/kee21c/90014796506

이 글은 스프링노트에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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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미술을 볼 수 있는 칸딘스키와 러시아 거장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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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시기간: 2007.11.27(화)~2008.2.27(수)(매월 마지막주 월요일 휴관)
■ 전시장소: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2층 제3,4전시실
■ 관람시간: 오전 11시부터 오후 7시까지
■ 관람문의: 02)525-3321, 단체문의:02)588-8421
■ 관람요금: 일반 12,000, 청소년 9,000, 어린이 7,000원


주최: 한러교류협회, 러시아미술관, 트레티야코프미술관
주관: sbs프로덕션, (주)솔명엔터테인먼트
후원: 외교통상부, 문화관광부, 주한러시아대사관, RUSINTERCENTER
 

http://www.2007kandinsk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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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술의 전당 입구


그제 2월 19일에 여자친구분과 함께 예술의 전당으로 칸딘스키와 러시아거장전을 보고 왔습니다. 사실 여자친구분이 말해주기 전까지 칸딘스키가 누구인지도 몰랐고 우리나라에서 전시회를 갖는다는 것도 몰랐네요. 인사동 전시회 말고 이런 큰 전시회는 한 1년만인 것 같습니다. 사실 칸딘스키의 작품은 이 전시회의 일부분이고 러시아의 19세기 후반 부터 20세기 초반까지의 급변하는 시간속에서 어떻게 러시아 미술이 변했는가를 볼 수 있는 전시회였습니다. 실제로 가보니 대표작도 레핀의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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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술의 전당 곳곳에 걸려있는 프래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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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칸딘스크와 러시아거장전 말고도 다른 전시회도 여러개 열리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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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 풍의 매표소

러시아 건물처럼 만들어놓은 매표소입니다. 미술전시회를 가면 매표소도 참 잘 꾸며놓죠. 평일이라 그런지 사람들도 없고 한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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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티켓

 여자친구분이 준비해준 삼성화재 할인 티켓때문에 한사람당 7,000원이라는 저렴한 가격에 볼 수 있었습니다. 일반 성인은 12,000원이나 SK투어비스(http://www.tourvis.com/)에 가입하시면 2,000원 할인이 되는 쿠폰을 받으 실 수 있으니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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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시회관 내부 사진

전시회관 내부에는 관람하는 사람들이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잘 꾸며놓아서 몇몇 분들이 앞에서 사진을 찍어가시더군요. 자 그럼 표를 확인하고 입장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내부에는 꽤 많은 작품들이 전시가 되어있어서 1시간 이상동안 관람을 해야만 했습니다. 지금 부터 기억에 남는 작품들을 하나씩 적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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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 E. 레핀 Ilya Efimovich REPIN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
No One Waited for Her
1883-1898, First version of the painting “No One Waited for Him”
Oil on wood, 44.5x37cm
ⓒ 2008, The State Tretyakov Gallery, Moscow

 일랴 레핀의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 입니다. 그의 대표작인데 여러가지 버젼으로 제작을 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검색을 해보니 남자가 서있는 그림도 있더군요. 이번 전시회에서 전시되고 있는 작품은 제일 먼저 그려진 작품입니다. 딱 처음 봤을때 작품 제목을 보지 않고도 한 여자가 들어오자 이미 방안에 있는 사람들이 상당히 뻘쭘해 하는 표정으로 뭔가 반기지 않는구나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었습니다. 저 끝에 있는 남자아이는 무엇을 저렇게 고민하고 있을까요? 이 작품은 러시아 혁명에 참가한 한 여대생에 수감생활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을때를 표현했다고 합니다. 고된 감옥 생활을 털어버리고 기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왔지만, 가족들의 표정이 기뻐하지않고 오히려 당혹해하고 있어서 급 실망하는 표정입니다. 어떤 기분인지 이해가 가시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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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윗 작품의 다른 버젼입니다.

 이번엔 남자가 방안으로 들어오는 장면입니다. 사람의 배치나 사물의 구도가 거의 흡사하군요. 일어나는 사람은 아마 노모인것 같고 오른쪽에 있는 아이들은 저 사내의 자식들인 것 같습니다. 꼬마 여자애의 표정이 상당히 적대적입니다. 아버지를 처음 보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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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 P. 보그다노프-벨스키 Nikolai Petrovich BOGDANOV-BELSKY
암산
Oral Counting. In the S. A. Rachinsky Public School
1895, Oil on canvas, 107.4x79cm
ⓒ 2008, The State Tretyakov Gallery, Moscow

전시회를 통틀어서 가장 재밌었던 작품이었습니다. 제목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선생님이 문제를 내놓고 아이들이 푸는 모양새입니다. 맨 앞에 있는 아이가 굉장히 똘망똘망하게 생겼군요. 오른쪽에 있는 아이 표정도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다른 아이들과 선생님들 표정들이 다 살아있어서 생동감을 더해줍니다. 마치 사진을 보는 듯한 느낌인데 사진으로 찍었더라도 표현해내지 못할 이미지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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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실리 수리코프, 황녀의 수녀원방문, 1912, 트레티야코프미술관

제목은 황녀의 수녀원방문이지만 유배되어온 황녀입니다. 뒷쪽에서 수근거리면서 바라보는 사람들이 보이는군요. 황녀는 유배되어서 그런지 멍하니 슬픈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19세기까지는 이처럼 사실적인 그림이 많았지만  20세기초가 되면서부터 급격하게 러시아 미술은 바뀌게됩니다.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사진기술이 발달하면서 더이상 사물과 그대로 그림을 그릴 이유가 없어진 것이겠죠. 그래서 아방가드로라고 하는 추상화가 대표적인 화풍으로 자리잡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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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 V. 칸딘스키 Vasily Vasilyevich KANDINSKY
블루 크레스트
Blue Crest
1917, Oil on canvas, 133x104cm
ⓒ 2008, The State Russian Museum, St. Petersburg

맨 안쪽에 숨어있던 두 작품 모두 칸딘스키의 작품입니다. 총 4작품이 있었는데 이 두작품이 대표작인 듯 강한 빨간색 벽에 큼직막하게 걸려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앞을 떠나지 못하고 무엇인가를 찾아보려고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더군요. 저도 한참을 봤지만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옆에 친절하게 설명이 되어있었지만, 한글로 되어있는 그 설명문이 무슨 암호문같이 다가오지 못하더군요. 큐레이터 오세훈씨의 글을 인용합니다.


현대추상화의 선구자인 바실리 칸딘스키는 처음에는 법학과 경제학을 공부하던 지식인이었다. 유럽에서 수학하던 그는 모네의 작품에 감명을 받아 화가의 길을 걷게 된다. 당시는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사회적 변화와 1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인간이성에 대한 환멸감과 비판이 시대를 불안감으로 뒤덮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변혁에 대한 열망과 함께 우연과 무의식, 그리고 우주 같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켰다. 「블루 크레스트」는 이러한 시대적 사회분위기를 반영하고 있으며, 특히 응축과 폭발, 생과 죽음, 이성과 비이성, 의식과 무의식 등의 대조가 화면 안에 긴장감을 고조시키면서 하모니를 이루고 있다. 선명한 빛의 색은 우리의 시각을 때리고, 리드미컬한 선의 느낌은 닭 벼슬을 또는 산등성이 너머의 도시와 태양의 형상을 떠올리게 하며, 이러한 모든 긴장된 에너지가 우리에게 감각적으로 전달되어 음악적인 선율을 가슴속에 떠올리게 하는 것이다.

화가의 직관에 의해 각인된 정서는 즉흥적인 에너지가 물감과 붓으로 전해져 최소화된 회화의 형식인 선, 색, 면 등으로 평면의 화폭 위에 구현되고 있다. 이러한 상상력과 조화를 추구하는 이성의 작용으로 더 많은 내용적 풍부함을 전달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전체적인 소개를 마칠까합니다. 처음 사실주의 작품들부터 죽 보면서 참 그림이 사진으로 표현할 수 없는 정말 많은 것들을 표현할 수 있구나 하는 것을 알게되었습니다. 마치 LP과 MP3 파일차이라고 할까요? 과학적으로 디지털적으로 알 수 없는 느낌들. 어떤 풍경이든 사물을 보고 그 작가가 느낀점들이 작품안에서 표현되는 것 같습니다. 사진도 물론 찍는 사람의 감정이 뭍어나지만, 작가의 눈으로 보고 작가의 손으로 그려진 그림들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을 경험하게 해줍니다. 또한 추상화는 정말 잘 모르겠지만, 사실주의 그림들은 러시아의 예전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생생함을 느끼게 해주더군요.

제 스스로 아쉬운점은 미리 이런 작품에 대해서 약간의 공부를 하고 갔다면 실제 작품을 보면서 좀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었을 것인데라는 아쉬움이 많이 남았습니다. 전혀 모른 상태로 가니까 그냥 대충대충 의미도 모르고 지나쳐버린 좋은 작품들이 많았습니다.  몇일 남지 않았지만 혹시 관람하실 분들은 조금이나마 인터넷 검색을 해보시면 좋은 글들이 많이 있으니 한번 보고 가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참고글. 일간스포츠 칸딘스키와 러시아거장전, 공식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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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디오 가이드

전시회장에 가셔서 설명을 들으실려면 오디오 가이드(3,000원)을 대여하셔서 작품을 감상하시면서 들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아니면 도슨트의 설명시간에 맞추어가시는 것도 좋습니다. 매일 오후 2시와 5시에 작품 하나하나를 설명해줍니다.

끝으로, 칸딘스키와 러시아거장전에 대해서 비판을 하자면, 관람시간이 1시간이 넘는 긴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편의시설이 전혀 안되어있더군요. 다른 전시회를 가면 중간중간에 쉴 수 있는 의자를 배치를 해두던데, 이건 뭐 처음에 집중해서 작품을 유심히 보다가 나중엔 허리도 아프고 다리도 아파서 진짜 유명한 칸딘스키 작품에는 진이 다 빠져버립니다. 그리고 미술관은 대부분 건조해서 목이 잘 마르게되는데, 안팍에 정수기라도 있었으면 정말 좋았을건데, 예술의 전당 이름은 그럴싸하고 시설은 그럴싸한데 정말 관람자들은 생각못하는 것 같아서 매우매우 유감스러웠습니다. 차라리 시립미술관이 훨씬 나은듯,,,

이 글은 스프링노트에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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